뉴욕 초고층 빌딩의 역사
엘리베이터를 발명한 사람은 엘리샤 오티스다. ... 오티스는 '어떻게 하면 공장의 위층으로 물건을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들여 올려지는 플랫폼을 고안했다. 그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안전한 엘리베이터를 발명했고 1853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직접 시연한다. ... 엘리베이터가 발명된 이후 뉴욕은 초고층 빌딩 건설 붐이 일어난다.
1900년대 초에는 주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초고층 빌딩이 많이 지어졌는데 대표적으로 메트 라이프 타워 (Met Life Tower, 1909), 울워스 빌딩 (Woolworth Building, 1913) 등이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완성된 초고층 빌딩들은 꼭대기에 첨탑이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1930년대에는 아르데코 양식의 초고층 빌딩이 뉴욕에서 지어진다. 대표적인 마천루로는 아메리칸 라디에이터 빌딩 (1924), 크라이슬러 빌딩 (1930),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931), 70 파인 빌딩 (1932), 록펠러 센터 (1939) 등이 있다. 아르데코 양식이 유행한 이후 뉴욕은 1973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이 완성되기 전까지 초고층 빌딩의 건설이 다소 침체된다. 시카고 지역에서 제2시카고학파 (Second Chicago School)로 대표되는 초고층 빌딩의 유행이 나타나 옮겨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카고 지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 건축가인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가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건축대학장으로 재직하며 시카고 지역 초고층 빌딩의 유행을 선도했다. 당시 시카고에서는 철골 튜브 구조라는 독특한 구조 시스템이 개발되어 초고층 빌딩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은 이 튜브 구조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붕괴하고 만다. 비행기 충돌로 강력한 열이 발생하여 튜브 구조의 철골 구조를 접합하고 있던 볼트들이 녹아버렸고 이는 빌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뉴욕의 랜드마크 보존법
1963년 펜실베니아역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개발로 철거되었는데, 이때 뉴요커들은 자신들의 건축 문화 유산이 사라질까 봐 걱정했고, 결국 랜드마크 보존법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랜드마크를 부수고 현대식 건축물을 짓는 것이 극히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는 공중권에 대한 권리를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래서 라파엘 비뇰리가 디자인한 432 파크 애비뉴 타워처럼 주변의 공중권을 끌어모아 굉장히 얇고 높은 유형의 빌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센트럴 파크
현대 조경 건축은 프레더릭 옴스테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가 조경 건축가 (Landscape Architect)라는 단어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옴스테드는 1857년에 센트럴 파크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면서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조경 건축가라고 명명했다. 이전까지는 조경 정원사 (Landscape Gardener)라는 명칭이 보편적이었다.
1821년부터 1855년 사이에 뉴욕의 인구는 네 배 이상으로 급성장한다. 1820년대 인구 12만 명에 불과했던 뉴욕은 1850년대 들어서 51만 명으로 불어난다. 당시 뉴욕은 남쪽 로어 맨해튼이 중심이었고 점차 북쪽의 미드타운 맨해튼으로 도시가 확장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미드타운 맨해튼은 굉장히 삭막한 도시가 되어갔고 노숙자들과 부랑민들이 뉴욕에 많이 퍼지게 되었다. 대규모 공원에 대한 계획조차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맨해튼 북쪽에 공원을 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옴스테드는 센트럴 파크 조성 당시 "지금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센트럴 파크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이 라인 공원
하이 라인 공원은 고가철로를 공중공원으로 만든 프로젝트다. 철거 위기에 몰린 하이 라인을 되살리기 위해 1999년에 하이 라인의 친구들 (Friends of the High Line)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결성된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 (Promenade plantee)라는 공중공원과 독일 뒤스부르크의 랜드샤프츠 공원 (Landschaftspark)에서 영감을 받았다.
2009년에 하이 라인 공원의 1단계가 개장하자 뉴요커들은 하이 라인 공원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된다. 부동산 개발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 라인 공원이 있는 첼시 지역의 땅값은 치솟고 부동산 개발사들은 앞다투어 이 지역에 주거와 상업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2011년에 하이 라인의 2단계가 완성되고 허드슨 야드 지역을 휘감는 마지막 단계가 2014년에 완성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하이 라인 공원의 개장으로 첼시 지역이 맨해튼의 또 다른 부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브로드웨이와 타임스퀘어
1800년대 후반 브로드웨이가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었을 때 브로드웨이에 첫 극장이 탄생한다. 1895년 만들어진 올림피아 (Olympia) 극장은 44번가와 45번가 사이에 있었는데, 브로드웨이와 타임스 스퀘어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올림피아 극장이 들어서기 이전에 타임스 스퀘어 지역은 마차 산업의 중심지로 사용되었고 영국 런던의 마차 생산지인 롱에이커 지역의 이름을 따서 롱에이커 스퀘어로 불렸다.
올림피아 극장이 등장한 후, 1904년에는 뉴욕 타임스가 42번가의 파브스트 호텔이 있던 곳에 원 타임스 스퀘어 빌딩을 지어 이사를 왔다. 뉴욕 타임스가 이 지역으로 오면서 롱에이커 스퀘어는 타임스 스퀘어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현대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타임스 스퀘어라는 이름이 드디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약 8년 후에 43번가의 빌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2007년에 포트 오소리티 버스터미널 맞은편에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디자인으로 완성된 초고층 타워로 옮겨간다.
뉴욕 타임스가 있었던 원 타임스 스퀘어 빌딩에서는 매년 12월 31일에 새해를 맞이하는 볼 드롭 이벤트가 펼쳐진다. 볼 드롭 이벤트는 뉴욕 타임스의 발행인 아돌프 옥스가 뉴욕 타임스의 새로운 본사 건물을 홍보하기 위해 1908년에 기획했다. 볼 드롭은 지금까지 계속 전해져 오는 타임스 스퀘어와 뉴욕의 대표적인 문화로 자리 매김했다.